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콘라트 아데나워 (문단 편집) === 제4차 아데나워 내각(1961~1963) === 앞서 언급한 이런 실책들로 인해서 아데나워의 위신은 다소 추락했지만 관록에 힘입어[* 오랜 정치생활과 명성 탓에 여전히 지지자들이 있었고, 마땅한 정치적 능력을 가진 거물들이 없었던 점도 한몫했다.] 4선에 성공한다. 다만, 3선 때와는 달리 단독 과반 의석 확보에는 실패해서 다시 자민당과 연정을 이루어야 했다. 하지만 이미 흐트러지기 시작한 아데나워의 정치감각은 쉽사리 돌아오지 못했다. 1961년, 자유시 문제가 흐지부지 장기화되고 동독 주민들의 탈출 행렬은 계속 이어지자 참지 못한 소련과 동독 당국은 결국 [[베를린 장벽]]을 건설하기 시작했고, 이는 베를린 위기라 불리는 대치로 이어졌다. 이 베를린 위기로 말미암아 베를린에서는 영국군과 미군이 서쪽에 서서, 소련군과 동독 경찰이 동쪽에 서서 중무장하고 전차까지 불러와 대치하는 살벌한 풍경이 벌어졌다. 아데나워는, 그 자신이 경멸해 마지 않던 프로이센과 독일 제국의 유산이자 수도였던 베를린을 위해, 또한 그가 마찬가지로 그토록 싫어했던 동독과 소련의 사회주의자들과 마주앉아 협상을 할 생각이 없었다. 이로 인한 것인지, [[https://www.spiegel.de/international/germany/secret-documents-released-adenauer-wanted-to-swap-west-berlin-for-parts-of-gdr-a-780385.html|슈피겔 지에 따르면]] 당시 아데나워는 비밀리에 미국 측과 접촉하며 한 가지 충격적 제안을 내놨다고 한다. 바로 서베를린과 기존에 영국군/미군 점령지였다가 소련 점령지로 넘어간 동독 지역들을 교환하자는 것이었다. 이 제안에 따르면, 소련과 동독 입장에서 정치적으로 상징성이 클 서베를린을 포기하고 양보하는 대신, 과거 영국군/미군 점령 하에 있던 튀링겐 주 전체와 [[슈베린]]을 포함한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메클렌부르크]]의 일부 그리고 [[라이프치히]]를 포함하는 [[작센]]의 일부 지역이 서독으로 편입될 지역으로 지정됐다.[* 아데나워 본인의 입장에서야 바다 한 가운데의 섬과 같아 방어하기도 힘들고, 자신에게는 여러 안 좋은 추억들을 떠올리게 하는 베를린을 포기하는 대신, 당시 동독의 주요 도시들 중 전쟁 피해를 가장 적게 입었고, 학문과 문화, 인구의 중심지이자 추가적인 인구 수용 능력 또한 넉넉한 라이프치히를 손에 넣는 것이 훨씬 좋은 아이디어로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라이프치히와 서베를린이 독일 통일에 미친 영향을 생각한다면, 만일 아데나워의 제안이 이뤄졌을 경우 독일 통일은 지금까지도 이뤄지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결과론적으로 보면 대표적인 외교 실책이 될 뻔한 셈.] 미국 쪽에서도 이 안건을 진지하게 고민했고, 소련 측에서도 서베를린 인구의 서독 이주를 포함한 이 안건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것이라는 예측도 나왔으나, 결국 --베를린 시민을 자처하던--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거부하며 이 안건은 무산됐다. 당시 서베를린 시장이었던 [[빌리 브란트]]가 [[존 F. 케네디]]를 불러 그 유명한 '''Ich bin ein Berliner''' 연설을 하게 하는 등 동분서주하는 동안 아데나워는 정말 손놓고 가만히 있는 것도 모자라 저런 제안까지 내놓은 것이다. 그러고는 나중에 [[사생아]]라는 빌리 브란트의 배경까지 --쪼잔하게-- 들먹이면서 당시 브란트의 행동을 비판했다.[* 빌리 브란트를 의회에서 프람 씨(Herr Frahm)라고 불렀다. 프람은 빌리 브란트가 나치를 피해 노르웨이로 망명하기 전 쓰던 성으로, 마찬가지로 사생아 출신인 외할아버지의 성이었다. 사생아여서 아버지의 성을 몰랐던 브란트에게, 외할아버지의 성으로 불린다는 건 당연히 큰 모욕이었다.] 당연히 이로 인해 아데나워는 큰 비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 무렵 터진 슈피겔 사건[* [[슈피겔]] 지에서 나토의 군사 계획에 대해 보도하자 국방부 장관이었던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가 아데나워의 재가를 받아 슈피겔 편집진들을 반역죄로 기소한 사건이다.]은 아데나워의 권력 누수 현상을 강화시켰고, 결국 4선 임기가 종결되기 이전에 후임자에게 총리직을 넘기겠다는 선언을 해야만 했다. 한편, 안 그래도 삐걱거리던 당내 2인자 [[루트비히 에르하르트]]와의 관계마저 악화일로를 걷기 시작한다. 유럽 경제공동체(EEC)[* 상술한 유럽 석탄철강공동체(ECSC)에서 이탈리아, 베네룩스 3국 등이 참가하면서 발전한 형태.]를 소수 회원국간 깊은 관계의 모임으로 만들고자 한 아데나워의 생각과 달리, 에르하르트는 영국 등 더 많은 회원국을 참가시키고자 했던 것. 총리 기간 재임 내내 프랑스와의 밀월관계를 유지하고 영국-미국과 사이가 그리 원만하지 못했던 아데나워와 달리, 에르하르트는 대표적인 [[친미파]] 인사였던 것도 두 사람의 갈등을 증폭시켰다. 이 갈등에 기름을 끼얹은 것은 1963년 드 골이 영국의 EEC 가입을 거부하면서였다. 다수의 그의 내각 장관들은 에르하르트와 그의 친미-친영 외교노선을 지지했고, 아데나워는 결국 그가 그토록 싫어했던 에르하르트에게 자리를 넘겨주면서 14년이라는 긴 시간[* 그의 임기는 바이마르 공화국과 ~~천년제국을 자처한~~ 나치 독일의 존속 기간보다 길었다.]동안 자리를 지켰던 총리직에서 퇴임한다.[* 현재까지도 헬무트 콜, 앙겔라 메르켈에 이은 3번째 최장기 임기다.] 다만 [[기독교민주연합|기민당]] 총수 자리는 1966년까지 유지했다. ~~그리고 계속 에르하르트의 발목을 잡으면서 3년만에 에르하르트를 실각시키고는 고소해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